Remarks by Deputy National Security Advisor Matt Pottinger to the Miller Center at the University of Virginia
맷 포틴저
국가안보회의 부보좌관
버지니아 대학교 밀러센터
발언내용 전문
Good morning everyone. I’m Matt Pottinger, the Deputy National Security Advisor, speaking to you from the White House. I bring warm greetings from the 45th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Donald J. Trump.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저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부보좌관 맷 포틴저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도널드
트럼프 제 45대 미국
대통령의 따뜻한 인사를
전하고자 합니다.
We gather today online, from a thousand different places, because a pandemic still prohibits us from meeting in person. But through the marvel of the Internet, we have managed to come together as an even bigger group than if there had been no public health emergency. In ways big and small, we are all tapping our ingenuity as Americans, as Chinese, as human beings, to overcome hardship and preserve our communities.
오늘 우리는
유행 전염병때문에 직접
만나지 못하고 이렇게 수많은
각각의 장소에서 온라인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경이로운
발명품을 통해 공중보건
비상사태가 없었을 때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다양한 방식으로
미국인으로서, 중국인으로서,
또 인간으로서의 창의력을
발휘하여 난관을 극복하고
사회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Big” examples of human ingenuity include harnessing biotechnology and data analytics to develop therapies and vaccines. “Small” examples of ingenuity include family members figuring out how to give each other haircuts when barbershops are closed. My wife, who is speaking on a panel later today, is a highly trained virologist. She is new to her role as the family barber, as you might have guessed by looking at my hair.
인간 창의력
발휘의 “큰” 사례로는
생명공학과 데이터 분석을
활용하여 치료법과 백신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창의력의 “작은” 사례로는
미용실이 문 닫은 상황에서
식구들끼리 서로 머리를
잘라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오후 패널에서
발표하게 될 제 아내는 능력있는
바이러스 전문가입니다.
하지만 지금 제 머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요즘 우리
집 미용사로 새로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This is the second time I’ve had the privilege of addressing an
audience at the Miller Center at the University of Virginia. Nearly a decade ago I was invited to speak
about what I’d
learned from service in the Marine Corps and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our
military and the civilians it defends.
Since that day, I’ve never forgotten the warmth and
wisdom of the Miller Center’s director, Governor Jerry Baliles, who passed away last October after a life of
public service to the Commonwealth of Virginia and to our nation. We give
thanks for people like Jerry.
버지니아
대학교 밀러센터에서 연설하는
특권을 갖게 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약 10년 전, 나는 해병대에서 근무하면서
배운 것들과 군민관계에
대해 발표하도록 초청받았었습니다.
나는 당시 밀러센터장이었던
제럴드 발릴스 전 버지니아
주지사의 따뜻함과 지혜를
잊지 못하고 있었는데,
버지니아와 미국을
위해 한 평생을 헌신한 그
분은 작년 10월에 작고하셨습니다.
나는 제럴드와 같은
분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Today, I’ve been invited by Professors Harry Harding and Shirley Lin to share some thoughts about U.S.-China relations. When Professor Lin told me this event would land precisely on the 101st anniversary of the start of China’s historic May Fourth Movement, I knew I had a potent topic for discussing the China of then and now.
오늘 저는
해리 하딩 교수와 셜리 린
교수의 초청을 받아 미중관계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린 교수께서
이 행사가 중국의 역사적인
5.4운동 101주년에
정확히 맞추어 개최된다고
하였을때 저는 당시의 중국과
지금의 중국이라는 중요한
주제가 떠올랐습니다.
On May the fourth, 1919, following the end of World War I, thousands of university students from across Beijing converged on Tiananmen Square to protest China’s unfair treatment at the Paris Peace Conference. Western nations chose to appease Imperial Japan by granting it control of Chinese territory that Germany had previously occupied, including the Shandong Peninsula.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9년 5월
4일, 베이징 전역에서
모인 수 천 명의 대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파리강화회의에서
중국이 받은 부당한 대우에
대해 항의하였습니다.
당시 서방국가들은
제국 일본을 달래고자 산둥반도를
포함해 독일이 점령했던
중국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일본에 넘기려고 했습니다.
The Chinese students who marched to Tiananmen that day shouted “give us back Shandong!” and “don’t sign the Versailles Treaty!” Police forced the students to disperse. But, as frequently happens when governments close down avenues for peaceful expression, some protesters resorted to violence. In a principled move that acknowledged popular anger, China refused to sign the Treaty of Versailles later that year.
이날 천안문으로
진입한 중국 학생들은 “산둥을 돌려달라”며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경찰은 학생들을
강제로 해산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평화적인
표현을 위한 행동을 제한할
때 상당수 그렇듯이 일부
시위자들은 폭력으로 답하였습니다.
중국 정부는 그해 말
대중의 분노를 인정하는
원칙적인 조치로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China would regain control of Shandong three years later with the help of the United States, which brokered an agreement at the Washington Naval Conference in 1922. But the movement ignited by those students exactly 101 years ago was about much more than nationalist outrage at “unequal treaties.” The movement galvanized a long-running struggle for the soul of modern China. As John Pomfret wrote in his fine history of U.S.-China relations, the May Fourth Movement aimed for “a wholesale transformation of Chinese politics, society, and culture.” “Mr. Science” and “Mr. Democracy” were the mottos of this movement to transport China into modernity. Some called the movement the “Chinese Enlightenment.” Vera Schwarcz wrote an insightful book by that title. In fact, there’s a lot of good scholarship on this subject. At least two eminent historians of modern China are participating in this event today—Oxford’s Rana Mitter and the University of Virginia’s John Israel. I refer you to the experts to explore the history and meaning of the May Fourth Movement.
중국은 3년 후 1922년 워싱턴 해군 회담을
주도했던 미국의 도움으로
산둥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101년 전
학생들에 의해 촉발된
5.4운동은 ‘불평등 조약’에 대한 민족주의적
분노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5.4운동은
중국의 현대화에 대한 오랜
투쟁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존 폼프렛이
미중관계사를 논하면서
밝혔듯이 5.4운동은
“중국 정치, 사회,
문화의 전면적인 전환”을
목표로 한 것이었습니다.
5.4운동의 목표는 “과학(赛先生,
Mr. Science)”과 “민주(德先生, Mr. Democracy)”가 중국을 현대화로
이끄는 것에 있었고 혹자는 5.4운동을 “중국의 계몽운동”이라고 까지
표현하였습니다. 베라 슈바르츠는
같은 제목으로 통찰력 있는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실제로 5.4운동은
학술적인 가치가 상당히
큽니다. 현대중국의
저명한 역사가로 이 회의에
참석한 옥스퍼드 대학교의
라나 미터와 버지니아 대학의
존 이스라엘 교수께서
5.4운동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보다 전문적으로 말씀해
주실걸로 압니다.
But I would like to spend a few minutes highlighting a few Chinese heroes that I believe embody the May Fourth spirit, then and now.
저는 그
당시에나 지금이나 5.4운동의 정신을
상징하는 몇몇 중국 영웅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Hu Shih is naturally identified a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leaders of the May Fourth era. He was already an influential thinker on modernizing China. Hu Shih’s family was from Anhui province. Like Lu Xun and many other leading writers of their generation, Hu Shih traveled overseas to study. After switching his focus at Cornell from agriculture to philosophy, Hu Shih studied at Columbia University under the American educator John Dewey.
후스(胡适)는 5.4운동 시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중 한 사람입니다. 당시 후스는 이미 중국현대화의
영향력 있는 사상가였습니다.
후스의 가족은 안후이성
출신이었고 루쉰 등 주요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해외
유학파 출신이었습니다.
후스는 코넬대학교에서
농업에서 철학으로 전공을
바꾼 후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미국의 저명한 교육자인
존 듀이 휘하에서 공부하였습니다.
Hu Shih would contribute one of the greatest gifts imaginable to the
Chinese people: The gift of
language. Up until then, China’s written language
was “classical,” featuring a grammar
and vocabulary largely unchanged for centuries.
As many who have studied it can attest, classical Chinese feels about as
close to spoken Chinese as Latin does to modern Italian. The inaccessibility of the written language
presented a gulf between rulers and the ruled—and that was the point. The written word—literacy itself—was the domain
primarily of a small ruling elite and of intellectuals, many of whom aspired to
serve as officials. Literacy simply wasn’t for “the masses.”
후스가
중국인들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은 바로 ‘언어’라는 선물입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중국의 문어체(文語體)는 ‘고전문체(文言文)’를 고집해 문법과
어휘가 수백 년 동안 변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어를 공부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중국
고문(古文)과
구어(口語)의
차이는 라틴어와 현대 이탈리아어의
차이만큼이나 큽니다.
문어체에 대한 접근불가능성은
통치자와 통치받는 자들
간의 격차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었습니다.
문자, 그리고 글
자체는 소수 지배엘리트와
공무직에 진출하기를 희망했던
지식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글은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Hu Shih believed otherwise.
In his view, written Chinese—in form and content—should reflect the
voices of living Chinese people rather than the documents of dead officials. “Speak in the language
of the time in which you live,” he admonished readers. He believed in
making literacy commonplace. He played a
key role promoting a written language rooted in the vernacular, or baihua—literally “plain speech.” Hu Shih’s promotion of
baihua is an idea so obvious in hindsight that it is
easy to miss how revolutionary it was at the time. It was
also highly controversial.
후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후스는 문어체의
형식과 내용이 살아있는
중국인들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하지 죽은 관리들의 문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후스는 독자들에게
“네가 살고 있는 시대의
언어로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후스는 언어를
대중화시키는데 노력하였고,
‘백화(白話)’, 즉 구어체를
토대로 문체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백화를 문체로 승화시킨
후스의 노력은 뒤돌아봤을
때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
그 당시 이것이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
놓치기 쉽습니다. 또 당시에는 상당히 논란을
야기한 일이기도 합니다.
Gu Hongmin, a Confucian gentleman and Western literature professor at Peking University, ridiculed widespread literacy for China and what it implied. In August 1919 he wrote: “Just fancy what the result would be if ninety percent of [China’s] four hundred million people were to become literate. Imagine only what a fine state of things we would have if here in Peking the coolies, mafoos [stable boys], chauffeurs, barbers, shop boys, hawkers, hunters, loafers, vagabonds, [etc.] all became literate and wanted to take part in politics as well as the University students.”
유교를
숭상하는 선비로서 서양문학을
가르치던 베이징대 교수인
구홍민(辜鸿铭)은 문체의
보편화와 그 의미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조롱하였습니다.
1919년 8월 구홍민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4억 중국인구의
90%가 글을 읽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상상해
보라. 여기 베이징에서 쿨리,
마부, 운전사,
이발사, 상점원,
매점원, 사냥꾼,
제빵사, 방랑자
등 모두가 글을 읽게 되어
대학생들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어떤
꼴이 될지 상상 해보라”
Such elitist chauvinism was—and some would argue still remains—a headwind impeding
the democratic ideals espoused by the May Fourth Movement. Hu Shih, wielding the language he had helped
bring to life, skillfully dismantled arguments against broadening the social
contract. “The only way to have democracy is to
have democracy,”
Hu Shih argued. “Government is an art,
and as such it needs practice.”
Hu Shih didn’t have time elitism.
이러한
엘리트 우월주의는 5.4운동에 의해
지지된 민주적 이상을 방해하는
역풍이었고 혹자는 이런
경향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할것입니다. 후스는
자신이 소생시킨 문체를
휘두르며 사회계약론을
반대하던 논조를 무너뜨렸습니다.
후스는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유일한 방법은
민주주의를 갖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후스는 “정부운영은
기술이며 그래서 연습이
필요하다”며 엘리트주의와
선을 그었습니다.
Still, May Fourth leaders were constantly sapped of energy by accusations, sometimes leveled by government officials or their proxies among the literati, that the movement was slavishly pro-Western, insufficiently Chinese, or even unpatriotic.
그럼에도
불구하고
5.4운동의 지도자들은
5.4운동이 친서방적이고,
중국적이지 않으며,
심지어는 애국적이지
않다는 정부관리들이나
이들을 대변하는 문인들의
비난에 의해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The life and contributions of P.C. Chang make a mockery of the notion that the May Fourth ideals weren’t “Chinese” enough. Like his friend Hu Shih, Chang had studied in the United States on a scholarship. Attracted to the theater, he was the first to adapt the Chinese story of Mulan for the stage. He brought Western plays to Nankai University, which his brother helped found. And he organized a tour of the United States by the Peking Opera star Mei Lanfang, adapting the music and dance to Western tastes. In China’s philosophy of moral cultivation and rigorous education, Chang saw advantages that could be combined with ideas from the West to form something new.
장펑춘(张彭春)
생애와 공헌은 5.4운동의 이상이 ‘중국적’이지 않다는
주장을 비웃습니다. 친구인 후스와
마찬가지로 장펑춘은 미국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였습니다.
연극에 매료된 장펑춘은
뮬란이라는 중국의 이야기를
극단에 소개했습니다.
장펑춘은 서방의 희곡을
형이 공동창립한 난카이
대학에 소개하였고 경극
대스타였던 메이란팡(梅兰芳)의 미국투어를
기획해 음악과 춤을 서방의
취약에 맞게 각색하였습니다.
장펑춘은 도덕과 교육을
중시하는 중국의 철학에서
서방의 사상과 결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This culminated in Chang’s crowning achievement: His decisive contributions to 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This was the document drafted after World War II by an international panel chaired by Eleanor Roosevelt. Chang, who was by then a veteran diplomat representing China, was a member of the panel. The declaration’s aim was to prevent despotism and war by morally obligating governments to respect fundamental rights. The rights enshrined in the 1948 declaration include life, liberty, and security; the right not to be held in slavery or subjected to torture; the right to freedom of religion; and the right to freedom of thought.
이는 장펑춘의
가장 큰 업적인 세계인권선언에서
빛을 보게 됩니다. 세계인권선언은
2차세계대전 후 엘레노어
루즈벨트가 주재하는 국제위원회에서
작성되었습니다. 장펑춘은
당시 중국을 대표하는 원로
외교관으로서 그 위원회의
일원이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의
목적은 각국 정부들로 하여금
사람의 근본적인 권리를
존중하도록 도덕적으로
의무화해 폭정과 전쟁을
방지하는 것이었습니다.
1948년에 발표된 세계인권선언은
생명, 자유, 안전을
포함해 노예가 되거나 고문당하지
않을 권리, 종교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였습니다.
“Marrying
Western belief in the primacy of the individual with Chinese concern for the
greater good”
Chang helped craft a document that would be relevant to all nations, John Pomfret wrote. A
declaration on human rights was not simply about the rights of the individual,
in Chang’s
view. It was also about the individual’s obligations to society.
존 폼프레트에
따르면 장펑춘은 “개인을 최고로
여기는 서방의 신념과 대의의
선을 추구하는 중국의 고민을
결합”해 모든 국가에
적용될 수 있는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장펑춘은
세계인권선언이 단순히
개인의 권리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개인의
의무도 포함된다고 본 것입니다.
Chang’s biographer, Hans Ingvar Roth of Stockholm University, highlighted the weight of Chang’s contributions to the Declaration: “Chang stands out as the key figure for all of the attributes now considered significant for this document: its universality, its religious neutrality, and its focus on the fundamental needs and the dignity of individual human beings.”
장펑춘의
전기작가인 한스 잉그바르
로스 스톡홀름대 교수는
세계인권선언에 대한 장펑춘의
기여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선언의 보편성, 종교적 중립성,
인간의 기본적 요구와
존엄성등에서 장펑춘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A few short years after the Declaration was adopted by the United Nations, Chang resigned his post as a Chinese diplomat, having grown dismayed by the lack of democracy in China. In diagnosing the problem, it is easy to imagine P.C. Chang prescribing a closer reading not of ancient Greek philosophy, but of traditional Chinese ideals about virtuous leadership. The cliché that Chinese people can’t be trusted with democracy was, as both P.C. Chang and Hu Shih knew, the most unpatriotic idea of all. Taiwan today is a living repudiation of that threadbare mistruth.
세계인권선언이
유엔에서 채택 된지 몇 년
후 장펑춘은 중국내 민주주의
결여에 실망해 외교관직에서
사임하였습니다. 문제를 진단하는데
있어 장펑춘은 그리스철학이
아닌 지도자의 품과 덕을
중요시하는 중국의 전통적인
사상을 탐구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장펑춘과 후스 두 사람
모두에게 “중국인들에게
민주주의는 어울리지 않다”는 말은 가장
비애국적인 말이었습니다. 오늘날 대만은
이에 대한 살아있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So who embodies the May Fourth spirit in China today? To my mind, the heirs of May Fourth are
civic-minded citizens who commit small acts of bravery. And
sometimes big acts of bravery.
Dr. Li Wenliang was such a person.
Dr. Li wasn’t
a demagogue in search of a new ideology that might save China. He was an ophthalmologist and a young father
who committed a small act of bravery and then a big act of bravery. His small act of bravery, in late December,
was to pass along a warning via WeChat to his former medical school classmates
that patients afflicted by a dangerous new virus were turning up in Wuhan
hospitals. He urged his friends to protect their families.
그렇다면
오늘날 중국에서는 누가 5.4운동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을까요? 제 생각에 5.4운동의
후계자들은 바로 시민정신으로
용기 있는 작은 행동을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큰
행동이 되기도 합니다.
의사 리원량(李文亮)이 그런 사람입니다.
리원량은 중국을 구하기
위해 새로운 사상을 찾아
나서는 대중선동가가 아니었습니다.
리원량은 안과의사고
젊은 아버지로서 처음에는
용기있는 작은 행동을,
나중에는 용기 있는
큰 행동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작년 12월, 리원량은 우한 병원에서
위험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들의 사례를 위챗을
통해 의대 동기들에게 전달해
용기 있는 작은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리원량은 친구들에게
가족을 보호하라고 했습니다.
When his warning circulated more widely than he intended, Dr. Li was upset and anxious—and with good reason. Supervisors at his hospital quickly admonished him for leaking word of the coronavirus cases. Dr. Li was then interrogated by the police, made to sign a “confession,” and threatened with prosecution if he spoke out again. Anyone tempted to believe this was just a case of overzealous local police, take note: China’s central government aired a news story about Dr. Li’s “rumor-mongering.”
리원량의
경고가 의도한 것 보다 널리
퍼졌을 때 리원량은 놀랬고
또 불안했으며 이는 이유있는
우려였습니다. 병원 내 리원량의 상급자들은
리원량에게 코로나바이러스
사례를 외부에 유출한 것에
대해 책망하였습니다.
이후 리원량은 경찰의
심문을 받았고, 정보
유출혐의를 ‘자백’한다는 것에. 서명하였고,
또 발설을 하면 기소될
것이라 협박 받았습니다.
이것이 지방경찰의
예외적인 과잉반응이다라고
믿고 싶으신 분은 다음 사실을
보십시오: 바로 중국
중앙정부가 리원량의 ‘허위사실 유포’를 뉴스로 보도했다는
사실입니다.
Then Dr. Li did a big brave thing. He went public with his experience of being silenced by the police. The whole world paid close attention. By this time, Dr. Li had contracted the disease he’d warned about. His death on February 7 felt like the loss of a relative for people around the world. Dr. Li’s comment to a reporter from his deathbed still rings in our ears: “I think there should be more than one voice in a healthy society, and I don’t approve of using public power for excessive interference.” Dr. Li was using Hu Shih-style “plain speech” to make a practical point.
이후 리원량은
용기 있는 큰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리원량은
경찰에 의해 억압받은 경험을
공개하였습니다. 온
세상이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이 때 리원량은 자신이
경고한 질병에 본인이 걸렸습니다.
2월 7일 리원량의
죽음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마치 친척을 잃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리원량이
임종에서 기자에게 한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건강한 사회에서는
한 가지 이상의 목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공권력이 과다한 개입을
찬성하지 않습니다. ”. 리원량은
후스의 ‘일상언어(大白話)’를 통해 현실적인
요점을 말한 것입니다.
It takes courage to speak to a reporter—or to work as one—in today’s China. Even finding an investigative reporter in China, foreign or local, is getting hard. Citizen journalists who tried to shed light on the outbreak in Wuhan went missing, including Chen Qiushi, Fang Bin and Li Zehua. More foreign reporters were expelled in recent months than the Soviet Union expelled over decades. Dr. Ai Fen, a colleague of Dr. Li Wenliang who also raised the alarm about the outbreak in Wuhan, reportedly can no longer appear in public after she spoke to a reporter.
오늘 날
중국에서 기자와 대화하거나
기자로 일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심지어 외신이든 현지기자든
중국에서 탐사 보도 담당
기자를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천치우스(陈秋实),
팡빈(方斌), 리즈화(李泽华)
등 우한에서 전염병을
조명하던 시민기자들은
실종되었습니다. 최근
몇 달 동안 소련이 수 십 년
동안 추방한 것 보다 더 많은
외신기자들이 중국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우한
발병에 대해 경종을 울린
리원량의 동료인 의사 아이펀(艾芬)도 기자와
통화한 뒤 더 이상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When small acts of bravery are stamped out by governments, big acts of bravery follow.
용기 있는
작은 행동이 정부에 의해
짓밟히면 용기 있는 큰 행동이
뒤따릅니다.
We have seen big acts of moral and physical courage recently by
people pursuing the ideals that Hu Shih and P.C. Chang championed a century
ago. Some are political insiders; some
have devoted their lives to God. Others follow the long tradition of scholars
serving as China’s
conscience. Many are regular
citizens. Xu Zhangrun,
Ren Zhiqiang, Xu Zhiyong, Ilham Tohti, Fang Fang, 20
Catholic priests who have refused to subordinate God to the Communist Party,
and the millions of Hong Kong citizens who peacefully demonstrated for the rule
of law last year. The list goes on.
우리는 100년 전 후스와
장펑춘이 지지하던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최근에
도덕적, 물리적으로
용기 있는 큰 행동을 했음을
목격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정치적 내막을 밝혔고,
어떤 이들은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다른 이들은 중국의
양심을 따르는 학자로서
중국의 전통을 보여줍니다.
많은 이들은 그냥 보통
시민들입니다. 쉬장룬(许章润), 런즈치앙(任志强), 쉬지용(许志勇), 일함 토티(伊力哈木), 팡팡(方方), 공산당의
휘하에 하느님을 복속시키는
것을 거부한 20명의
천주교 사제들, 작년에
법치를 위해 평화적으로
시위한 수백만 명의 홍콩시민
등, 용기있는 행동을
보여준 사람들의 명단은
계속 이어집니다.
As the May Fourth Movement today marks the inaugural year of its second century, what will its ultimate legacy be? It is a question only the Chinese people themselves can answer. The May Fourth Movement belongs to them. Will the movement’s democratic aspirations remain unfulfilled for another century? Will its core ideas be deleted or distorted through official censorship and disinformation? Will its champions be slandered as “unpatriotic,” “pro-American,” “subversive”? We know the Communist Party will do its best to make it so. After all, Mao Zedong had limited tolerance even for Lu Xun, China’s most celebrated modern writer and one of the minority of May Fourth heroes whose writing wasn’t heavily censored by the Party. In 1957, an official named Luo Jinan asked Chairman Mao: “What if Lu Xun were alive today?” Mao’s reply about the national hero surprised many in the audience: “He could either sit in jail or continue to write or he could remain silent.”
5.4운동이 두 번째 세기를
맞게 되는 오늘, 5.4운동의
궁극적인 유산은 무엇일까요? 중국인들만이
답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5.4운동은 중국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5.4운동의 민주적인
열망은 다음 한 세기동안에도
실현되지 않게 될까요?
5.4운동의 핵심사상이
검열에 의해 삭제되고 허위정보로
왜곡될까요? 5.4운동의 지지자들이 ‘매국노’들이고
‘친미주의’적이며 ‘체제전복’을
꾀한다고 비난 받게 될까요?
우리는 중국공산당이
그렇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오쩌둥(毛泽东)은 중국에서
가장 추앙받는 현대 문학가이자
5.4운동의 몇 안 되는 영웅
중 하나로 당에서도 검열하지
않는 루쉰(鲁迅)조차도 참기 힘들어 했습니다.
1957년 뤄지난(罗稷南)이라는
관리가 마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루쉰이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마오의 다음과 같은 답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감옥에 앉아 글을
쓰고 있거나, 입을 다물고 있거나
둘중 하나겠지”.
Those with the fortitude to seek and speak the truth in China today may take comfort, however, in something Lu Xun wrote: “Lies written in ink can never disguise facts written in blood.”
오늘날
중국에서 진실을 찾고 말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은 “잉크로 쓴 거짓말은
피로 쓴 사실을 숨길 수 없다(墨写的谎说,决掩不住血写的真实)”는 루쉰의 문장에서
위안을 얻을 것입니다.
One final thought, from a U.S. perspective: Hu Shih famously preferred solving concrete problems to wallowing in abstract political theory. But let me break his rule against discussing “isms” to ask whether China today would benefit from a little less nationalism and a little more populism. Democratic populism is less about left versus right than top versus bottom. It’s about reminding a few that they need the consent of many to govern. When a privileged few grow too remote and self-interested, populism is what pulls them back or pitches them overboard. It has a kinetic energy. It fueled the Brexit vote of 2015 and President Trump’s election in 2016. It moved the founder of your university to pen a declaration of independence in 1776. It is an admonition to the powerful of this country to remember who they’re supposed to work for: America first.
미국의
시각에서 하나만 더하겠습니다. 후스는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추상적인
정치이론에 몰두하는 것
보다 더 선호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념’에 집착하지
않는 후스의 규칙을 위반하게
되겠지만, 나는 중국이 민족주의를
조금 줄이고 포퓰리즘을
조금 더 키운다면 과연 뭘
얻을 수 있을지를 질문해
봅니다. 민주적 포퓰리즘이란
좌우의 문제라기 보다는
상하의 문제입니다. 소수의 통치자들이 다수의
시민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소수 특권층이
피통치자들과 너무 동떨어져있고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면
포퓰리즘이 그 간극을 메우거나
그들을 타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포퓰리즘은
운동에너지를 갖고 있어
2015년에는 브렉시트를,
2016년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이끌었습니다.
이는 또한 버지니아
대학교의 창립자로 하여금
1776년 독립선언문을 작성케
하였습니다. 미국에서
포퓰리즘이란 권력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누구를 위해 일해야 하는지를
환기시킵니다: 바로
미국 우선입니다.
Wasn’t a similar idea beating in the heart of the May Fourth Movement, too? Weren’t Hu Shih’s language reforms a declaration of war against aristocratic pretension? Weren’t they a broadside against the Confucian power structure that enforced conformity over free thought? Wasn’t the goal to achieve citizen-centric government in China, and not replace one regime-centric model with another one? The world will wait for the Chinese people to furnish the answers.
5.4운동의 정신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후스의 언어개혁은
귀족적 허세에 대한 선전포고가
아니었을까요? 자유사상보다
순응을 강요하는 유교적
권력구조에 대한 공격은
아니었을까요? 중국에
시민이 중심이 된 정부를
세워 정권이 중심이 된 정치모델을
대체하려는 목적이 아니었을까요?
세계는 중국인들의
답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Thank you.
감사합니다.